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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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 지정번호

      사적 제150호
    • 현소재지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규 모

      강당에서 중문지까지 134m, 폭은 동원과 서원의 외곽 기준 172m
    • 특 징

      3탑 3법당 가람배치
    • 유 례

      무왕 부부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탑과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대에 조성된 사찰 터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현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다가 연못 속에서 출현한 미륵삼존을 영접하고 이를 계기로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지었다고 한다. 미륵사지는 두 번의 조사(1966·1974년)가 이루어진 이후, 1980년부터 16년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삼국시대(백제)에는 중앙에 목탑을 두고 동쪽과 서쪽에 석탑을 두었으며, 탑 뒤에 각각 법당을 두고 회랑으로 구획한 3탑 3법당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더불어 뒤에는 동쪽과 서쪽에 승방과 함께 거대한 강당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임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3탑 3법당의 가람배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출현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상화했다는 점에서 백제 장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구성이다. 미륵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사찰 앞쪽에 2개의 당간지주를 배치하고 이를 둘러싼 회랑을 두었으며, 다시 그 앞에 연못을 둔 형태로 확장됐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약 17세기 경까지는 사찰의 동쪽부터 폐기되면서 이후 작은 규모로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기와류와 더불어 토기류·금속류 등 19,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과 석등의 조영, 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법당의 지하구조와 더불어 출토된 암·수막새·녹유서까래기와, 서탑 해체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은 백제문화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원류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2015년7월 4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륵사지석탑

    • 지정번호

      국보 제11호(1962. 12. 20 지정)
    • 현소재지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2
    • 규 모

      높이 6층 14.24m, 폭 11.5m의 정방형
    • 특 징

      목탑을 충실히 모방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양식
    • 유 례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연기설화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에 불공드리러 가는길에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청하여 사자사 주지인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지 석탑은 당시로서는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다. 특히 이중기단 위에 민흘림기둥, 기둥과 기둥사이를 걸치는 창방과 평방, 양 끝 기둥을 높이는 귀솟음 기법, 기와집 처마와 같이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간 옥개석을 사용한 점은 석탑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초기의 모습, 즉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석탑은 노후로 붕괴할 위험이 있어 2001년 탑 해체 조사에 착수하여 2017년 보수정비를 완료하였는데. 2009년에 석탑 1층 중앙 심주석(돌기둥)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 일괄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금제사리봉영기에서는“백제…기해정월(百濟…己亥正月)”이라는 기록이 나옴으로써 639년(무왕 40년 1월)에 탑의 기초가 세워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