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면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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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마면의 유래

    본시 마한 땅으로 백제 때에는 금마저(渚)라고 했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금마군에 속했다. 고려 충혜왕 5년(1344)에 금마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금마군이 익주(益州)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는 익산군이 되고, 금마가 익산군청의 소재지였으므로 군내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 동고도리, 서고도리 - 전의 군내면
    · 기양리, 신룡리, 산북리, 용순리, 갈산리 - 전의 미력면

    면명은 예전에 금마저 금마군의 치소이며 중심지였으므로 그에서 취했다.

  • 동고도리

    1914년 옥동, 옥전리, 옥후리, 상대리, 하대리, 구정리, 한정리, 누동, 교동, 신동의 전 지역과 원두리, 건지리, 죽림리, 두천면의 구기리, 신남리, 제석면의 탑리, 부상천, 황동 등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 이름은 마한의 옛 도읍지라 하여 고도(古都)에 동·서의 구분으로 동고도리라 했다.

    • 황동(黃洞, 黃甫洞, 황부골) : 황동은 등성이 너머 황각동(黃閣洞)과 관련된 이름이라 한다. 신룡리의 황각 참조
    • 신촌(新村)·대정(大井)·분통골 : 신촌은 당시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생긴 이름. 대정에는 큰 샘이 있었다. 분통골은 전에 그곳에서 분토(粉土, 흰 흙)가 나오는 곳이 있어 생긴 이름. 분토골→분통골
    • 교동(校洞) :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
    • 천마 1동(天馬一棟) | 천마 2동(天馬二棟) : 1974년 군 부대명인 천마부대의 영외 거주자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이루어진 마을.
    • 누동(樓洞)·한정리(寒井里) : 누동에는 전에 청심루(淸心樓)가 있었고, 누각 훈지당(塤 堂)도 누동에 있었다. 한정은 익산 구지(舊誌)에 "한정은 군 아사(衙舍)의 동편 백보(百步)에 있는데 그 샘물이 겨울에는 다숩고 여름에는 차며 수토(水土)로 생긴 병이 잘 낫는다" 했다.
    • 금동(琴洞) : 누동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훈지(塤 -악기 이름)와 관련된 이름이라 한다.
    • 구정(九政, 건지리-뒷동산) : 구아 참조. 건지리는 건지산 밑이라 해서 생긴 이름.
    • 이화동(梨花洞) : 배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 옥동(玉洞, 옥두말)·비성골·사정거리 : 옥동, 옥두말은 치소(治所) 때 옥(獄)이 있던 뒤의 마을이었으므로 옥후리(獄後里)라 했는데 옥의 한문자가 옥(玉)으로 바꾸어졌다. 비성골은 전에 객사(客舍) 앞이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공적비와 선정비(善政碑)가 많이 세워져 있었기로 비선골→비성골. 사정거리는 전에 활쏘기 연습장이며 시합장인 사정(射亭)이 있었던 거리다.
    • 옥천동(玉川洞) : 옥동에서 근래 갈려 나온 마을로 옥룡천 가에 위치했으므로 옥동의 옥에 내 천(川)자를 붙인 것.
    • 중앙동(中央洞)·한다리목 : 근래 이루어진 마을로 금마면의 중앙에 위치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 한다리목은 큰다리목이라는 말.
    • 천마동(天馬洞) : 천마부대의 하사관들이 사는 곳.
    • 상대(上大) : 장터거리로 대장 마을 위쪽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
    • 대장(大場) : 큰 장터라는 말
  • 서고도리

    1914년 남정리(南征里), 원촌, 서변리(서편), 상제리, 하제리, 저전리(楮田里)의 전 지역과 용동, 연동, 원두리(元豆里), 건지리, 죽림리(竹林里), 두천면(豆川面)의 구기리(舊基里)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 이름은 동고도리와 위치에 따라 동·서로 구분한 것.

    • 상제(上堤)·서편말·방죽안·행정(杏亭) : 상제는 전에 있었던 증벽지(澄碧池) 안쪽. 행정은 소세양(蘇世讓)의 퇴휴당(退休堂)이 있던 곳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이루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옛날 향정 뒷산에 토성(土城)이 있었고 그 곳에 군대가 머물러 있던 정(停)의 이름이 행정이라는 설(백제 때에는 군대가 머무르던 停을 亭으로도 썼다)이 있다.
    • 서계(西溪)·하제(下堤)·도토성이 : 서계는 옥룡천의 서쪽에 있으므로 일컫던 이름. 하제는 상제와 상하로 구분된 이름. 도토성이는 옛 문헌에 猪土城으로(猪의 새김은 돝) 기록되었는데 향정 마을 뒷산에 지금도 토성의 자취가 있으니 도토성(都土城)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또 도는 우리 지명에 있어 터(基)라는 말로 많이 쓰였으니 터의 토성, 즉 행정지에 있는 토성이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 원촌(原村) : 옛날부터 있던 큰 마을이므로 일컫는 이름(본촌)
    • 연동(蓮洞, 연방죽거리)·산제당(山祭堂, 지아골) : 연동은 현재의 연동제에 연이 가득 차 있는 옆 마을. 산제당은 전에 산제당이 있었다. 지아골은 전에 기와를 굽던 곳.
    • 용정(龍井) : 마동(薯童, 백제 무왕)의 어머니가 못의 용과 교합해서 마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과 가까운 마을이므로 붙인 이름.
  • 신용리

    1914년 구룡리, 독정리, 침령리, 황각동의 전 지역과 구곡리, 신정리의 일부로 구성됨. 리의 이름은 신성과 구룡에서 한자씩 따서 지은 것.

    • 황각(黃閣, 황각동) : 익산에서 제일 명승지라 이르는 경치 좋은 곳으로 익산 구지에 도 "사시 풍경이 입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없어 시인 묵객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황각동은 중국에서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학루(黃鶴樓, 黃閣)에서 취한 명칭이다.
    • 도천(道川, 도내골)·갓점·감나무골 : 도천은 전에 마을 가운데에 서울 방면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고 옆에 내가 있는데 비올 때가 아니면 내 바닥이 길이 되는 일이 많았으므로 길내→道川이라는 설도 있으나 도내골이 본 이름이므로 도내를 道川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명에 터를 더 또는 도라 한 곳이 퍽 많으니 텃내골의 뜻인 도내골로 보는 것이 가합할 것이다.
    • 구룡(九龍, 독징이-독젱이(篤亭里)·독점·국골·당내갈·범정이 : 구룡은 국골의 뒤 바위에 언제 누가 생겼는지는 모르나 구룡동천(龜龍洞天)이라고 새겨져 있어 그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나 그 지형이 구렁으로 되어 있으니 구렁을 한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독징이, 독점은 전에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독을 짓는다하여 독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우리나라에 수백군데 있다. 국골은 전에 구곡(九曲)으로 썼는데 그 지형이 굽이굽이 굽은 곳이니 굽골→국골. 당내갈은 당집이 있던 곳의 내 옆이기에 생긴 이름. 범정이는 범이 내려와서 어쩌구저쩌구하나 믿을 수 없는 일.
    • 종평(宗坪, 마릿들) : 종평은 마릿들(머릿들의 옛말)의 한문자 표기다. 머리들은 윗들의 뜻.
  • 산북리

    1914년 내산동, 외산동의 전 지역과 여산군 서이면의 내산리의 일부로 구성되었다.

    • 산북(山北)·내산(內山, 내산동)·외산(外山) : 산북은 1972년 내산과 외산을 합친 분리명이 되었다. 내산동은 미륵산과 용화산 사이의 산 속에 위치했기에 생긴 이름이고, 외산은 내산과 구분된 이름
  • 용순리

    1914년 용순리, 신원리, 동변리, 망동, 양촌의 전 지역과 서변리, 군내면의 신정리, 오자동, 두천면의 중왕리의 각 일부로써 구성되었다.

    • 동편(東邊)·상정말 : 미륵산의 남쪽 미륵사지 안으로 흐르는 내를 경계로 그 동편에 위치하였으므로 일컫는 이름이다. 한문자로는 東邊으로 쓰나 동편으로 부른다.
    • 서편(西邊)·버들골(楊洞)·바랑골(望洞) : 버들골은 예전 읍지에도 양촌(楊村)으로 썼으니 버들이 많아서 생긴 이름일 것. 바랑골은 동쪽 용순리 등에서 들 건너로 바라보이는 곳이니 바람골→바랑골→望洞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망산, 망동 등이 거의 그런 것으로 보아 짐작된다.
    • 용순(龍脣, 용순이)·매모통이·안뜸 : 용순이는 마을 산이 용과 같고 마을이 용의 입과 같은 속에 위치하고 있어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매모통이는 산모퉁이라는 말. 안뜸은 원용순의 안뜸.
    • 신정(新井, 새터)·오작골(오작동) : 신정의 본 이름은 새터고 신정은 그곳에 좋은 샘이 있어 샘과 관계있는 이름이다. 오작골은 전에 소씨 재각 뒤쪽에 오죽(烏竹)이 많아서 오죽골→오작골이라고 한다.
    • 신기(新基, 오목새터)·신서원(新書院)·온탕거리 : 신정이 새터이므로 그와 구분된 이름으로 우묵한 곳이라 하여 오목새터라고 했다. 신서원은 노상리의 구서원(舊書院)과 구분한 명칭으로 김장생(金長生)을 모신 화산서원(華山書院)을 일컫는다.
  • 기양리

    1914년 기양리, 마전리, 노상리, 향산리, 미륵면의 서변리, 구문천면의 기상리의 일부로써 구성됨. 리명 기양리는 이내의 대표적인 마을에서 취한 것이지만 본시는 기준성(箕準城)의 남쪽이니까 기양이라 했을 것이다.

    • 노상리(路上里)·탑셍이·구서원·물탕골·쪽지밭골·박골 : 노상리는 금마 황등선이 예전부터 큰 길이었는데 그 길 위의 마을이므로 생긴 이름이다. 탑셍이는 미륵탑이 서있는 곳이므로 탑선이→탑셍이. 구서원은 신서원과 구분된 명칭. 이공수(李公遂)를 모신 화암서원(華岩書院)을 일컬음. 물탕골에는 약수가 나는 물탕이 있다. 박골은 미륵사의 담 밖의 골이란 뜻. 쪽지밭골은 다랑다랑한 밭이나 또는 넓은 밭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짓는다는 뜻의 쪽지밭이다.
    • 기양(箕陽, 기양리)·구시울 : 기양은 이명 참조. 구시울은 구시골이라는 말인데 구시의 끝소리 시가 ㅣ로 끝나므로 그 ㅣ 밑에서 골→굴→울이 된 것이고 그 지형이 구시(구유)처럼 생겨 이루어진 이름.
    • 마전(麻田, 삼바지)·갈키매들 : 마전 근처의 논이 전에는 모두 밭이었다는데 그 밭에 삼을 많이 심었던 듯하다.
    • 향산(香山, 여꾸지)·아가골 : 여꾸지는 옆 마을인 서쪽 사람들이 옆 마을이라 하여 옆고지라 하던 것이 여꾸지로 변한 말이다.
  • 갈산리

    1914년 갈산리, 각동, 지석면의 삼봉리 등의 전 지역으로 이루어졌다.

    • 갈산(葛山, 갈메) : 옆 산봉우리가 갈모처럼 원추형으로 생겨 갈모봉이라 부른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옛 문헌에는 산 이름을 삼정산(三鼎山)으로 기록한 곳도 있다.
    • 각봉(各峰)·각동(各洞)·삼봉(三峰) : 각봉은 1972년에 각동과 삼봉을 합쳐 지은 분리명이고, 각동은 본시 외따로 몇 호씩 떨어져 있어 생긴 이름이다. 삼봉은 등너머 마을 원봉(元峰)에서 갈린 마을로 전에는 산봉(山峰)으로도 기록되었으나 본 이름이 삼봉이고 산봉우리를 셋으로 볼 수도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