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금마면 소재지에서 서북쪽 약 1.5㎞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하여 뒤에는 미륵산이 있고
앞쪽은 익산평야가 내려다보이고 있다.
보덕성(報德城), 오금산성(五金山城)이라고도 불리었던 익산토성은 오금산(五金山)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61m이며, 산 정상부에서 동북우각(東北隅角)으로 하여 남향한 수구(水口)를
석축열(石築列)로 막고 능선을 따라 흙과 돌을 같이 사용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산성의 평면을 보면 서변능선(西邊稜線)은 거의 직선이고 서남우각(西南隅角)에서 내려온 남쪽은 성
안으로 굴곡을 이루며 동남우각(東南隅角)에 연결된다.북변(北邊)과 동변(東邊)은 모두 외장(外長)하여
북동우각(北東隅角)에서 연결된다.
수구(水口) 중앙에서 서남우각(西南隅角)까지의 성곽길이는 78.9m이며, 수구 중앙에서 동으로
14m, 서로 23m는 거의 수평을 이루며 안으로 2m까지는 마제형(馬蹄形) 테라스를 이루고 있다.
서남우각에서부터는 거의 평탄한 능선을 따라 회랑도(廻廊道)를 설치하고 그 외연(外緣)에 석루(石壘)를
쌓고 하단에 호석열(護石列)을 두르고 외호(外濠)를 팠다.
여기에서 북서우각까지는 158m이다. 북변은 능선을 따라 회랑도를 둘렀는데 그 형상은 서변과 같으며
길이는 185m이다. 동변도 서변과 같은 형상이며 길이는 138m이다. 남변은 동남우각(東南隅角)에서
서쪽으로 53m 지점까지는 거의 수평을 이루어 건물터나 광장 등의 시설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북 횡단폭은 177m로서 동서가 약간 길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馬韓百濟文化硏究所)에서1980년과 1984년에 걸쳐 발굴조사 한 결과에
의하면, 이 성의 기초부분은 전면에서 높이 45㎝, 폭 60㎝, 두께 50∼60㎝의 장방형석재(長方形石材)를
사용하여 단벽(段壁)을 쌓았다. 벽석(壁石) 이면(裏面)에는 활석 등의 잡석의 적심을 폭 5.2m의
두께로 메꾸었다. 적심석(積心石) 이면에는 모래와 점토를 번갈아 판축형식(板築形式)의 적심을 이루었음은
특이한 공법이라 하겠다.
남쪽 성문은 이 성의 정문이 되겠는데, 성문지(城門址)는 서편 산 계곡 언덕받이에 있었다. 문지
폭이 4.8m, 길이 4.4m나 되며 바닥에는 돌을 깔았던 흔적이 보이며 조사 결과로는 문 출입구
위에는 문루(門樓)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내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큰 것과 작은 토기 항아리 조각이 많이 발견이 되었고 또 도연토기삼족고배(陶硯土器三足高杯)와
감대( 臺) 등이 발견되고, 와당(瓦當)은 무문 숫막새문이 발견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도 발견이 되었고, 부여지역에서도 발견되었던 양식이다. 이 산성이 오금산성(五金山城)이라고도
불리워지게 된 이유는 백제 무왕이 어려서 이곳에서 마를 캐면서 오금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보덕성(報德城)이라는 이름은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이 금마저(金馬渚)에 자리잡고 보덕국(報德國)을
세웠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에 전하여 기록된 보덕국(報德國)에 대한 기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받들고 남하하여 온 왕족인 안승(安勝)을 고구려
국왕으로 봉하고 그들을 이 금마 지역에 정착하도록 하였다가 신라 문무왕(文武王) 14년에 가서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금마지(金馬誌)의 고적(古蹟) 보덕성조(報德城條)에는 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덕성은
군의 서쪽 1리쯤의 거리에 있는데 옛터가 겨우 남아 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 당한 뒤
그 유민(遺民)들이 당에게 복종하지 않고 늘 반항하다가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남은 백성들을 모아 패강(浿江)에서 당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오다가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서 왕족인 안승을 만난 연고로 그를 받들고 재령(한성)
땅으로 와서 그를 임금으로 받들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여 올리기를 "우리의
선왕(先王) 장왕(藏王)께서 도를 잃어 나라를 잃게 되었는데 이 신(臣)들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데 앞으로 신라의 번병(藩屛)이 되고자 합니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하고 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뒤에
신문왕(神文王)이 안승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나경에 머물러 있게 하자 금마저에 남아 있던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 등이 금마저에서 모반했다가 복주(伏誅)되고 말자 나머지 무리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의거하여 또 반역을 했다.
신문왕은 장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고 그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의 주(州)와 군(郡)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는 보덕성의 위치와 유래를 말한 것으로 과거 우리가
익산토성을 보덕성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하지만 익산토성이 보덕성이라는 근거는 없다. |